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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가 만난사람] 손태호 이발사 "은빛 은근한 가위손 60년"일제 말기 가세 기울며 이용기술 배워, 가장 역할
수십 년 단골들 "한 번 맡겨보면 다른 데 못가죠!"
동갑 부인과 회혼 앞둬 "정직·약속 지키기가 신조"
  • 주성식 기자
  • 승인 2018.12.04 14:04
  • 댓글 2
손태호 이발사(80)가 광주고등학교 이발소에서 손님의 머리를 다듬고 있다. 그는 60년 넘게 '한 번 온 손님은 꼭 다시 오게 하자'를 신조로 최선을 다해 왔다.

(광주=포커스데일리) 주성식 기자 = 광주광역시 광주고등학교에는 조그만 이발소가 있다. 교문 옆 수위실과 맞붙어 있는 10평 남짓한 공간이다. 이발 의자는 하나, 이발소다운(?) 그림도 걸려 있고 세면대와 여러 이발도구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다.

눈에 띄게 거울이 많다. 그 중에서도 손님이 머리를 깎(이)는 동안 스스로 뒤통수를 확인할 수 있도록 걸린 거울이 특이하다.

TV 앞에 놓인 응접의자에는 대개 손님(들)이 있다. 이발 순서를 기다리기도 하지만 동네 노인들이 그저 들르는 경우도 많다. 그들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담아 버리거나 서로 세상살이 이야기를 띄엄띄엄 주고받는다.

수십 년 전 이곳에서 시퍼렇던 머리를 빡빡 밀었던 학생들이, 이제는 노인이 돼 성긴 백발을 다듬으려 찾아오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대개 미장원으로 간다. 이발소는 어쩌면 세월이 어김없이 제 몫을 해냈다고 고집하는 데 밀려, 세상의 한 켠으로 물러나 있는 듯하다. 이러다 영영 스러지고 마는 것일까.

광주고 이발소에서만 20년 가까이 숱한 단골들의 머리를 다듬어주고 있는 손태호(80세) 이발사를 만났다. 이발 일 64년, 생애 81년이 순식간이다.(이 대담에는 손태호 이발사와 회혼(回婚)을 앞두고 있는 동갑네기 부인 김경례 씨도 함께 했다.)

 

- 올해 팔순인데 감회가 적지 않겠다.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다. 근래 몇 년간 건강 때문에 걱정이었지만 최근 회복돼 많이 좋아졌다. 일하는 데도 큰 무리가 없어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 광주고등학교 이발소 운영은 할 만한가?

"학교 당국이 여러모로 배려해줘서 만족스럽다. 졸업생들이 가끔 들러 ‘이발소가 아직 있네!’라며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그들 가운데 개업부터 지금까지 단골이 된 사람도 있다."

- 이발 일을 시작한 계기는?

"내가 보성 노동에서 낳기는 했지만 어릴 때 장흥 장동으로 이사해서 고향은 장흥인 셈이다. 아버님은 여러 물건을 거래하는 점포를 내고 계셨는데, 내가 17살일 때 돌아가셨다. 위로 누나 하나만 있는 6남매의 장남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를 중퇴하고 고민하던 중 마침 친분이 있던 이발사가 이발을 배워보라고 권했다. 그분은 일본에서 이발을 배우고 일하다가 돌아왔는데, 대단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분 밑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며 이발 기술을 배웠고 3년 뒤 20살에 내 이발소를 열었다."(그는 1965년 면허를 취득했다. 당시 사회 각 분야에서 정비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면허 업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 그렇게 빨리 다 배울 만큼 이발 기술이 간단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시 내가 처한 상황이 절박한 데다 이발 일이 나와 잘 맞았기 때문에 기술을 익히는 것이 빨랐다고 생각한다.

이발은 요즘 미장원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과는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있다. 수없이 가위질을 해서 가장 어울리는 머리 모양을 만들어 낸다. 세밀하고 정교한 조각쯤 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손태호 이발사의 이용사 면허증. 1965년 교부된 것으로 그가 이발 일을 시작한지 10년이 지난 후다. 당시 행정 체제 등이 미비해 면허 업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 개업한 이발소 운영은 어땠나?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내 솜씨 덕이었는지 모르지만 고객이 몰렸고, 금세 직원만 5명이 넘게 커졌다. 한 마디로, '날렸다'."

- 이른 시기에 성공한 셈이다.

"거칠 것이 없었다. 특히 19살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어도 얼굴조차 몰랐고, 어느 날 우리 집에서 누나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처음 봤다. 딱 큰며느리 감이었다. 천생연분이라고 해야 하나, 둘이 서로 첫눈에 반해 사귀게 됐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경직돼 있었다. 특히 처가는 장흥의 유지 집안이었으니, 내가 눈에 찼을 리 없지 않았겠나. 멍석말이 당할 위기도 여러 번 넘겼다.

결국 22살에 결혼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 않던가."

- 순풍에 돛 단 격이었겠다,

"세상이 전부 내 손안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창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던 1961년 그러니까 5·16혁명이 나던 해 군대에 가게 됐다. 나이도 많은 데다 결혼까지 한 입장이었지만 어쩌겠는가.

101 보충대로 입대했는데, 보병 기본교육만 받고 바로 장교이발소에 배치됐다. 부대장부터 나만 찾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입대 3개월 만에 휴가를 나올 정도였다.

32개월 군대 생활을 큰 어려움 없이 편하게 생활한 셈이다. 제대가 가까울 무렵 월남 파병이 시작됐는데, 소속 부대장이 함께 가자고 어찌나 끈질기게 권유하는지 거절하느라 혼난 기억이 뚜렷하다.

떠나면 안 된다는 ’각시‘의 간곡한 뜻이 없었다면 월남에 갔을 것이다."

- 제대 후 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군대 문제까지 해결되고 나니 어떤 장애물도 없이 탄탄대로만 걸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초년 성공은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맞았다고 할까, 내가 바람이 났다.(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돈은 여유롭게 벌리지, 인물 좋지(지금 봐도 그 표현이 거짓이나 과장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성격 호탕하지, 놀기 좋아하지 그러니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특히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이발소 일은 직원들에게 맡겨 놓고, 술·여색(女色)부터 바둑·장기 등 온갖 놀이 그리고 화투 같은 노름까지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빠져들었다. 어디 하나 빠진 데 없는 대표적인 방탕 생활이었다."

- 이발소 운영이나 가정에도 문제가 생겼을 것 아닌가?

"30살 무렵부터 10여년 남짓 전북, 보성, 장평 등으로 옮겨 다닌 것도 다 그 여파 때문이었다. (그는 부인을 바라보며) 이 사람이 잘 견디고 잡아주지 않았다면 고비를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복(福) 중의 복이라는 처복(妻福)을 타고난 모양이다.

또 다행인 것이 이발 기술을 익혔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것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발을 하면서 다 해결할 수 있었다. 이발소를 열기만 하면 사람들이 몰렸으니까,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손태호 이발사에게는 수십 년 넘게 광주 이외 지역에서도 찾는 단골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이발소 청소를 하기도 하는 등 격의 없는 친구로 지낸다. 김경례 씨 오른쪽이 한상문(81세, 계림동) 그 오른쪽은 최준선(73, 동명동) 씨다.

- 이발 말고 다른 일을 한 적도 있었나?

"1980년 큰 아들에게 곤란한 상황이 닥쳤다. 아마 내 평생 가장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때였을 것이다.

그 일을 처리하느라 광주, 서울로 정신없이 다녔다. 그동안 모아뒀던 돈도 몽땅 써버렸다. 다행히 억울함은 면할 수 있었지만 가위를 잡을 기력도 의욕도 사라졌다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우연히 침술을 배우게 됐는데, 시술을 받아본 사람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침술을 (시술)하며 환자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의료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고, 자연스럽게 ’지정약국‘이라는 약품 판매점을 겸하게 됐다. 큰 딸이 간호사인 것도 도움이 됐다.(지정 약국의 정확한 명칭은 ’약종상‘ 혹은 약포(藥鋪)다. 지난 날 벽지(僻地) 등 정식 의사·약사가 없는 곳에서 약품 판매 등 초보적인 의료행위를 할 수 있었다)

이발소에 그랬던 것처럼 환자들이 몰렸다. 내가 사람을 보살피는 데 장점이 있는 모양이다. 1992년 제도가 정비되면서 더 이상 운영하는 데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 폐업했다. 그 10여 년 동안 이발 일을 할 때와는 다른 보람을 느꼈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될 수 있었다."

- 그럼 본업으로 복귀한 것인가?

"그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그 때에야 내 생각대로 살게 됐다고 해야 할까?

지정약국을 폐업한 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놀았다. 지정 약국을 운영하며 경제적 여유가 생겼고, 폐업 과정에서도 상당한 소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장흥과 장성에서 짓는 농사도 적지 않았고...

당시에 친구들을 비롯해 나랑 어울릴 만한 사람 중에 나만 차를 갖고 있었다. 내가 주도해 온갖 모임, 행사를 만들고 전국 각지로 다니며 놀았다. 말 그대로 한량 생활이었다."

- (부인에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니, 괜찮았는가?

"(슬며시 웃으며) 그러게요."

 

손태호 이발사와 동갑인 부인이 환하게 웃고 있다. 회혼(回婚)을 앞두고 있는 부부는 첫눈에 반해 22살에 결혼한 뒤 해로(偕老)해 왔다.

- 언제 어떤 계기로 방황(?)을 끝낸 것인가?

"2000년 무렵 한 지인과 이야기하던 중 우연히 광주고등학교 이발소에 자리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됐다. 노는 것에도 지쳐 있었다고 할까, 바로 결정해 학교와 계약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것이 벌써 18년째다."

- 수익은 괜찮은가?

"큰 돈 저축할 만큼은 아니다.(웃음) 이발소 운영하고, 어디 손 벌리지 않고 생활할 정도다. 그만하면 충분한 것 아닌가?

나는 이 나이에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몇십 년째 멀리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와 만날 수 있으니, 큰 기쁨이요 보람 아니겠는가."

- 멀리서도 손님이 오나?

"물론이다. 광주 먼 곳뿐 아니라 화순, 곡성 등 시외에서도 십수 년째 다니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

- 비결이 있나?

"무슨 비결이 있겠나. 그저 배우고 해왔던 대로 있는 정성을 다해 머리를 다듬을 뿐이다. 내 신조가 ’한 번 온 손님은 꼭 다시 오게 하자‘이다.

작은 것이지만 손님들에게 꼭 요구르트 한 잔이라도 권하고 불편한 것은 없는지 살핀다. 가격도 최대한 낮춘다.(광주고 이발소 조발 가격은 7천원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처럼 대하는 것이다.

(부인이 “곁에서 보면 감탄할 정도로 손님들에게 정성을 기울인다. (손 이발사가) 불 같은 성격이라, 일상 생활에서는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발 가위만 잡으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분해진다. 요즘 말로 ‘진상’ 고객이 온갖 까다로운 주문을 해도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모두 처리한다”고 보충 설명했다.)"

- 최근 이발소에 비해 미장원이 크게 늘고 있는데?

"요즘 세상이 호화롭고 크고 그럴 듯해 보이는 것만 좋아하지 않던가. 또 부권(父權)이 쇠퇴하다 못해 아예 사라지면서, 남자 애들도 어머니를 따라 미장원에 다니는 것이 당연하게 돼버린 것도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이발소는 점점 사라지지 않겠는가? 우선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 이발 기술을 익히려면 최소 3년은 고생해야 하는데 누가 하려고 하겠는가.

내 경우를 봐도 이 기술은 평생 써먹을 수 있는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몇 년 전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했는데 최근 많이 회복됐다.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때까지 건강하게 일하는 것이 소원이다. 최근 나와 아내 둘 다 귀가 좋지 않다. 상대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가끔 다투는데, 그 문제 해결하는 것이 요즘 목표다."

 

손태호 이발사는 김경례 여사와 슬하에 2남2녀를 뒀다. 외손(外孫)으로는 증손자까지 봤다. 이제 지나온 날보다 거쳐야 할 세월이 더 짧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자식으로 남편으로 아비로 열심히 살아온 지난 날, 상처나 흠결마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았으니, 앞날인들 무엇을 걱정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오늘도 은빛 은은하게 빛나는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다듬는다. 그 앞에서는 아무리 지위가 높고 대단한 사람이라도 머리를 맡겨야 한다.

그러니까 손태호 이발사 그는 모든 인간다움의 결정(結晶)·정화(精華)를 드러내도록 마무리하는 장인(匠人) 아닌가!

주성식 기자  focusjebo@ifocu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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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호#이발사#60년#동갑 부인#단골#광주고등학교#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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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수진 2018-12-08 09:19:47

    60년을 넘게 같은길을 걷고 계시다는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상처나 흠결마저 아련한 그리움이 되었다는 말씀이 멋있고 와닿았습니다! 저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좋은 기사였습니다!   삭제

    • 강수진 2018-12-08 09:04:22

      상처나 흠결마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았다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지금 연세까지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말씀도요! 존경스럽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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